내가 CASIO A/S센터에서 본 일이다.
삭은 장수생 하나가 A/S센터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EW-K3000을 내 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사전이 진짜인지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직원의 입을 쳐다본다. A/S센터 직원은 장수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사전을 살펴 보고 "좋아요."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아요."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사전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 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A/S센터를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사전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EW-K3000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A/S센터 직원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사전 분실사전 아닌가요?"
장수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길에서 주운거 아닌가요?"
"어떤 수험생이 이렇게 귀한 사전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장수생은 손을 내밀었다. A/S센터 직원은 웃으면서 "좋아요."하고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 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사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거치른 손바닥이 누더기 위로 그 사전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노량진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사전을 열어서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좋은 사전을 어디서 났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아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도서관에서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줏은 것도 아닙니다. 어떤 수험생이 이런 좋은 사전을 길에 흘림니까? CASE 하나라도 줏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하루 세끼 중에 한끼만 밥 사먹고 한끼는 토스트로 떼웠습니다. 새책 살돈으로 중고책을 구입했지요. 어쩌다가 주말에는 막노동을 했지요. 이 사전을 얻느라고 석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사전을 샀단 말이오? 그 사전으로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사전으로 영어를 정복해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싶었습니다."